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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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엄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8-06 16:44 조회9,863회 댓글0건본문
종목 : 국보 67호
명칭 : 화엄사각황전 (華嚴寺覺皇殿)
분류 : 사찰건축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제작시기 : 조선 숙종 25년(1699)부터 약 4년간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정유재란때 소실 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공주는 인경황후(仁敬王后) 막내 딸로 태어났다. 황후는 1680년(숙종6년) 음력 10월 26일 2경(二更: 오후 9시~ 11시)에 경덕궁에서 발병 8일 만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인 20세에 승하했다. 어머니를 여윈 아기 공주는 유모와 나인의 보살핌 속에 자라났다.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장육전 법당을 짓기 시작할 무렵에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同參하여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을 보았고, 무릇 2층 48칸으로서 그 장엄함은 비길 데 없었으며,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1703년에는 삼존불(三尊佛)․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하자 조정에서는 사액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 하고,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채팽윤(蔡彭胤)이 숙종27년(1701)에 쓴 장육전 중건 상량문
願堂大施主 延礽君 親王子 甲戌生 李氏 壽命長
원당대시주 연잉군 친왕자 갑술생 이씨 수명장
成造大施主 親王子母 戊戌生 崔氏 壽命長
조성대시주 친왕자모 무술생 최씨 수명장
수명 장수 발원하며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조성 대시주로 기록 되어있다. 연잉군은 전생에 농산(農山) 스님이며, 금산사 목정굴에서 백일 관음 기도후 입적하며 숙빈최씨 꿈에 아들로 환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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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영조 45년(1769) 자운(慈雲), 처관(處寬)선사가 중수, 헌종13년(1847년) 의헌(義憲), 윤행(允幸), 도실(道實)스님이 중수, 1927년 8월 박 사시화(朴 四時華), 김 청정화(金 淸淨華) 등이 시주로 각황전 보살상(관세음, 보현, 문수, 지적)을 개금 하였다. 1936년 정만우스님이 보수, 1973년에 불보살 개금불사를 도광스님이 하셨고, 1997년에 불단 해체보수, 불보살개금불사, 법당마루 불사를 종열스님이 했으며, 1999년에 종걸스님이 탑 모양 인등설치, 2006년에 각황전 법당 뒤에 영가 영구위패단 및 아미타불 입상을 종삼스님이 조성했으며, 2012년 10월 5일에 법당뒤에 방화된 문짝을 2013년 2월에 교체 하였다. 영관 주지스님이 2014년 4월 9일 종걸 주지 스님이 설치한 각황전 탑형태 불등단을 철거하고 닺집 형태 불등단(佛燈壇)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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