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지리산 대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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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敎兩宗智利山大華嚴寺事蹟碑銘
天下仙境 智異山은 頭流山 頭留山 方丈山 南嶽山 地異山 等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雪岳山과 더불어 二大 名山일뿐만 아니라 東金剛 西九月 南智異 北妙香 中八公山등五大名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白頭山을 主峰으로 咸鏡․長白의 兩大山脉 중 長白의氣象이 迤邐하여 妙香 雪嶽 五臺 太白山등으로 走行하다가 이곳 南海에 이르러 드디어 停留하였다고 하여 頭留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창건주 緣起祖師가 三昧中에서七佛祖師인 大智文殊師利菩薩께서 많은 菩薩이 圍繞한 가운데 華嚴經問明品等을 問答함을 보고 智利山이라 命名하였다고 한다. 海拔 一千九百一五米의 高山으로 東의天王峰과 日留峰, 西의 般若峰과 月留峰, 南의 文殊峰 七星峰 德坪峰 明善峰 그리고 中央의 中峰등 峭壁한 奇峰들을 眷屬으로 거느린 智慧道場 智利山이 되었다. 禪敎兩宗大伽藍華嚴寺는 全羅南道求禮郡馬山面黃田里十二番地 智利山南麓에 자리하고 있는 大韓佛敎曹溪宗 第一九敎區本寺이다. 義湘祖師가 華嚴經을 傳敎토록한 華嚴十刹中하나이니 十刹이란 北岳太白山浮石寺, 南岳智異山華嚴寺, 康州伽倻山海印寺, 中岳八公山美理寺, 瑞山伽倻山普願寺, 鷄龍山岬寺, 良州金井山梵魚寺, 大邱毘瑟山玉泉寺, 全州母岳山國神寺, 漢州負兒山靑潭寺, 原州毘摩羅寺등으로 전하는바 차이가 있다. 華嚴寺를 中心으로 東南에는 雙溪寺, 鷰谷寺, 西北에는 泉隱寺 그리고 東北에는 法界寺, 大源寺, 碧松寺, 靈源寺, 實相寺, 百丈寺등이 마치 衛星처럼 둘러싸고 大莊嚴法界를 형성하고 있다.
華嚴寺는 이름 그대로 華嚴經을 所依經典으로 하는 華嚴宗寺刹이다. 우리나라 華嚴宗史를 살펴보건대 華嚴經을 들여온 慈藏律師와 六十卷本晉華嚴經疏를 撰述한 元曉大師가 바탕을 만들고 六六一年에 入唐하여 智儼會下에서 華嚴經을 受學한 義湘祖師가 海東華嚴初祖가 되어 화엄종의 始源을 이루었다. 元曉는 芬皇寺에서華嚴經疏를 지어 圓融한 敎學을 크게 떨쳐 圓融宗, 圓宗, 海東宗, 法性宗등으로 일컫는 종파를 이루었다. 入唐하여 終南山智儼門下에서 華嚴經을 受學하고 歸國하여 浮石寺를 創建한 後華嚴宗祖가 된 義湘祖師이후에 新羅華嚴은 相源․神琳․順應․理貞․賢俊․希朗․觀惠등으로 繼承되었다. 高麗王建의 福田이었던 海印寺의 希朗과 後百濟甄萱의 福田이었던 華嚴寺의 觀惠는 南北의 對立的宗派를 形成하기도 하였다.高麗均如는 南北岳華嚴을 統合하였고 大覺國師義天은 圓敎宗風을 드날렸다. 一四0七年인 太宗七年議政府의 奏請으로 從來의 十一宗을 七宗으로 縮小하였으니 華嚴宗刹은 모두 長興金藏寺․密陽嚴光寺․原州法泉寺․淸州源興寺․昌原熊神寺․江華栴香寺․襄陽成佛寺․安邊毘沙寺․順天香林寺․淸道七葉寺․新寧功德寺등 十一個寺刹에配屬되었고 一四二四年인 世宗六年에 다시 七宗을 禪敎兩宗으로 統廢合하였으니 禪宗寺刹로는 서울 興天寺․開城崇敎寺․演福寺․觀音窟․楊州僧伽寺․開慶寺․檜岩寺․津寬寺․高陽大慈庵․公州鷄龍寺․晉州斷俗寺․慶州祇林寺․求禮華嚴寺․泰仁興龍寺․高城楡岾寺․原州覺林寺․殷栗停轂寺․安邊釋王寺등 十八個寺刹中에 歸屬시킴으로써 朝鮮時代에는 禪宗寺刹에 移屬되었다. 위와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엄종찰 화엄사의 창건주는 지극한 효심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天竺으로부터 연을 타고 東土에 到來한 緣起祖師이다. 그는 五四四年 百濟 聖王二二年智異山에 들어와 華嚴寺를 創建하고 華嚴宗趣를 宣揚하였다.
이외에도 高敞煙起寺․羅州雲興寺․求禮甘露寺․鷰谷寺․昆陽栖鳳寺․山淸大源寺등 많은 절을 創建하였다. 화엄사는 茶의 本鄕으로도 이름이 높은데 六七七年義湘祖師가 丈六殿법당을 중창하고 丈六田에 차를 심었으며 興德王三年(828)에 唐의 使臣金大廉이 長竹田을 조성하여 安智院터 주변에 차를 심었으니 竹露茶의 기원이 되었고 天竺의 摩耶茶와 더불어 茶種子를 이곳 華嚴院에 栽培하여 華嚴茶의 本鄕이 되게하였다. 그후 8세기경 同名의 緣起祖師가 全羅北道高敝郡興德面(興德縣)에서 출생하였으니 生沒年代와 자세한 行蹟이 남아있지 않고 華嚴要決十二卷, 華嚴經眞流還源樂圖一卷, 華嚴經開宗決疑三0卷, 大乘起信論珠網三卷, 大乘起信論捨繁取妙一卷등을 찬술하여 宗學을 선양하였으나 著述은 現存하지않는다. 現存하는 唯一한 新羅寫經인 唐本八十華嚴經二軸의 寫經은 이 緣起祖師가 十數人의 寫經師를 指揮하여 製作한 國寶이다. 六三六年 慈藏律師가 入唐遊學途中 五臺山文殊로부터 傳해 받은 佛舍利一百顆를 全國各地에 分散奉安하였는데 이는 緣起祖師의 至極한 孝心을 기려 孝臺라고 부르는 四獅子三層石塔도 그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이어 丈六殿三層四八間을 建立하였으니 至今 覺皇殿의 前身이다. 三五代景德王의 命으로 丈六殿壁에 靑紫石으로 晉華嚴經을 새겼으니 이는 國內最高의 石經이다.
- 이와 때를 같이하여 큰절에는 華嚴院․奉天院․安智院․弘敎院․西遊院․彌陀院․禪林院․證林院等의 八院과 山內八一個所의 庵子가 創建되었으니 이른바 華嚴의重重無盡한 網羅幢世界를 形成하였다. 羅末麗初에 風水地理와 圖讖의 元祖로서 널리알려진 道詵國師는 靈岩出生으로 一五歲때 月留山華嚴寺에서 得度한 후 華嚴宗寺刹의 中興을 주도한 華嚴宗 스님이다. 도선국사는 入唐遊學中에 만난 一行禪師로부터汝國山川이 多背本主故로 或作九韓하며 或作三韓하여 內外逆賊이 連綿不絕하리니 此는 天地血脉不調之病也라 山川도 若此하여 爲戰場也라 하고 行倚繩座하여 拔筆點地曰人若有疾이면 尋血脉針炙即愈矣라 山川之疾도 亦然하나니 今我落點處에 建寺立佛立塔立浮圖則如人針炙할 새 名曰裨補라는 指示를 받고 歸國하였다.
훗날 太祖가 登極한후 傳奏함으로써 太祖는 訓要十條에 이를 反映하고 大匡인 朴述希에게 親授하여無違施行토록 하였다. 道詵國師는 華嚴寺에 駐錫하면서 憲康王의 도움을 받아 三百餘칸의 堂宇를 建立하여 湖南地方의 甲刹로 昇格시켰고 아울러 崔致遠으로 하여금 華嚴經社會願文을 짓게하고 華嚴大德인 賢俊에게 命하여 華嚴經을 講說케하는 한편 國戚重臣인 金一과 金林甫로 하여금 晉華嚴經을 寫經케하고 國統과 僧錄등에게는 貞元華嚴經을 講說토록 하는등 寺勢를 확장하고 宗學을 중흥하였다고 한다. 王妃金氏도 벼三十石을 喜捨하였으며 八八六年에는 定康王의 도움으로 三一칸의 光學藏을 建立하였다고 한다.
이어 高麗太祖 또한 道詵의 傳言을 받아 全國에 裨補寺刹로써 禪刹五百과 敎刹三千八百寺를 創建토록 命하였는데 華嚴寺는 旣存寺刹中 第一 먼저 擴張重修되었다. 高麗光宗朝를 前後하여 後唐의 閩府에 가서 大藏經一部를 모시고 와서 開城帝釋院에 奉安한 洪慶禪師가 光宗의 命으로 華嚴寺 큰절 堂宇와 山內庵子까지 一新重修하였고 文宗의 第四子인 大覺國師義天이 初期華嚴宗刹靈通寺로 出家하여華嚴宗僧으로써 한동안 駐錫함에 따라 文宗은 義天을 위해 大規模擴張補修를 하는 한편 全羅南北道와 慶尙南道등 三道의 사찰에 每年穀物獻納을 許諾하였으니 이를 貯藏키위해 華嚴寺 一柱門밖에는 두채의 큰 倉庫가 지어지기도하였다. 一七代仁宗은 華嚴法師인 定仁王師에게 華嚴寺를 重修토록 하고 道詵國師의 行蹟碑도 세우게하였다. 二七代忠肅王은 道詵의 駐錫處였던 圓炤庵을 重建하였고 王師인 祖衡은 王의 後援으로 全面補修하는 한편 祝釐所인 願堂을 創建하였다. 三三代 恭愍王때에는 李成桂와 李豆蘭將軍이 南原荒山에서 倭敵阿只抜都軍과 싸울때 敵을 물리친 先鋒隊가 勝利의 赤色旗를 세웠던 求禮郡土旨面文殊洞에 赤旗庵을 創建하였다. 高麗中期以後부터는 參考할 史料가 없다. 朝鮮朝에 접어들어서는 一四二四年司憲府의 上疏로 世宗이 從來의 七宗을 禪敎兩宗으로 統合하고 兩宗에 各一八個寺刹씩 配屬시켰으니 이때華嚴寺는 禪宗의 一八個寺刹中 首寺刹로서 說禪法會와 講經法席을 常設하고 많은 高僧大德을 輩出하였다.
이들은 國民이 塗炭에 빠지고 나라의 危殆로움에 임해서는 閑靜한 修行을 접고 스스로 救國의 先鋒이 되어 苦難의 現場을 避하지 않았다. 一五八四年에는 芙蓉靈觀의 弟子인 浮休善修가 華嚴經을 講說함에 全國의 龍象大德이 구름처럼모였고 一五八七年에는 中觀海眼이 이어 華嚴法席을 열었다. 一五九一年에는 無染堂戒訓禪師가 禪敎一致論을 闡揚하여 護國安民과 和合團結을 주창하기도 하였다.一五九二年 四月 倭軍이 釜山에 上陸하였으나 國防의 對備는 全無하여 對抗없는 避難에 民生은 허둥지둥 彷徨하였다. 이곳 求禮地方에서 不撤晝夜勇猛精進하고 있던 스님들은 無主空山이 된 國土의 悽慘한 現實에 통분하고 柱杖子代身槍을 집고 奮然히 일어나 民生을 塗炭에 빠트린 倭敵을 향해 下山하였다. 當時 麗水市德忠洞鐘高山石泉寺스님으로 華嚴大選兼禪敎判의 僧職을 가지고 있던 慈雲處寬스님은 壬亂이 勃發하자 바로 水軍에 入隊하여 李舜臣將軍의 副將으로서 거북船設計등 重要한 役割을하였으며 晉州城戰鬪에서 激烈히 싸우다가 戰死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慈雲大將이라는 職帖을 下賜하고 左水營忠武詞에 配享토록 하였다. 中觀海眼도 湖南地方에서 僧兵을 糾合하여 싸웠고 雪泓大師는 華嚴寺住持로서 河東과 求禮의 길목을 通過하는倭軍을 막기위해 스스로 僧大將이 되어 僧兵을 糾合하였으며 房處仁等三百餘名의 華嚴寺스님을 引率하고 軍糧米三百石을 준비하여 楡谷의 石柱鎭을 固守하다가 壯烈하게 戰死하였다.
이와같이 護國安民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衆寡不敵의 상황은 계속되었다. 一五九三年 드디어 倭軍이 華嚴寺에 侵入하였고 五百餘칸의 殿閣이 一時에 全燒되었으며 丈六殿의 石經도 모두 火熱로 片石이 되는 비극을 맞는 한편 蟾津江에서는 梵鐘을 日本으로 옮기려던 倭將加藤淸正의 倭軍무리들의 배가 顚覆하여 모두 魚食이 되고 말았다. 殺生과 破沒의 빈터는 假幕을 치고 寺域을 지키던 대중들에 의해再建되기 시작하였고 苦難의 세월에도 華嚴寺는 覺性․海眼․戒訓등 世稱九八大德을輩出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復元의 機運을 얻지 못하고 있던 華嚴道場에 重興主가 出現하였으니 明의 將帥와 함께 海戰에서 큰 功을 세운 탓으로 四溟의 천거로 判禪敎都摠摄이 된 碧岩覺性大師이다. 나라에서 스님들로 하여금 南漢山城을 쌓게할 때八道都摠攝으로 헌신하였으며 仁祖로부터 衣鉢을 下賜받고 華嚴寺住持가 된 一六三十年부터 六年間重建佛事를 수행하였다. 大雄殿을 비롯하여 一部佛殿및 佛像과 幀畵․丹靑․鑄鐘등의 불사를 이루었으나 丈六殿 復元은 못한채 一六四十年五月三南都摠攝이 되었다. 一六三六年 十二月에는 丙子胡亂이 일어나 朝廷이 南漢山城으로 避難하였다는 消息을 듣는 卽時 僧兵三千名을 糾合해서 降魔軍이라 이름하고는 上京途中大田에서 仁祖가 三田渡에서 降伏하고 還宮하였다는 消息을 接하고는 痛恨의 心境으로 華嚴寺로 돌아온 이후 一六五十年禮曹에서 救國愛民道場인 華嚴寺를 禪宗大伽藍으로 昇格시켰다. 一六五三年에는 碧岩等 五十餘名을 施主로 하고 智英等 六名을佛母로하여 靈山會上이 다시 到來한듯한 장엄한 掛佛幀靈山會上圖가 造成되었다. 一六九九年에는 碧岩의 弟子인 桂坡性能이 스승의 遺命을 받들어 丈六殿을 復元코자 發願하고 建築費마련에 전전하였다.
어느날밤 白衣老人이 現夢하여 이르기를 손을 물속에 넣어서 물이 묻지않는 스님으로 하여금 化主로 選定하고 化主하려나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化主冊을 맡기도록하라 하였다. 다음날 大衆을 모아놓고 모두 물속에 손을 넣게하였으니 大衆스님들중에 오직 한 老스님만이 물이 묻지않았다. 化主冊을 받은 老스님은 하는 수없이 化主次 洞口밖을 나가다가 나물캐는 한 老婆를 만나 化主冊을 던져주었다. 화주책과 現夢이야기를 전해받은 老婆는 또한 어찌할 方法없어 제가 죽어 王宮에 태어나서 華嚴寺丈六殿을 重建할수 있도록 해주십사라는 發願을 한후 곁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말았다. 그는 死後願生으로 肅宗의 妃 仁敬王后金氏夫人의 둘째딸로 태어났으나 이름모를 病에 걸려 百藥이 無効였다.
어느날 肅宗이 꿈을 꾸니 公主의 命이 다하였으니 王은 지체없이 華嚴寺의 丈六殿을 復元하라 그 功德으로 公主는 반드시 忉利天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記別하였다. 王은 十萬兩의 內帑金을 하사하였고 英祖의 母親이며 肅宗의 後宮인 淑嬪崔氏도 同參하여 一七0二年 二層七十칸의 大法堂이 竣工되었다. 延礽君(英祖)의 願堂을 삼고 三尊佛像과 四大菩薩像을 造成奉安하고는 七日間慶讚法會를 열어 丈六殿落成을 告하고 肅宗이 覺皇殿이라 改稱하고 刑曹參判李震休에게 쓰게하여 扁額을 下賜하는 한편禮曹에서는 禪敎兩宗大伽藍으로 昇格시켰다 . 中興된 大伽藍에서는 一七0六年二月에는 明谷堂玄眼이 禪敎를 講說하였고 같은해 七月에는 雪岩堂秋鵬이 華嚴經을 宣說하였다.
- 一七一一年 四月부터 北漢山城築造를 始作하였는데 이때 性能이 八道都摠攝으로써 僧營의 築城을 監督하여 竣工한 功勳으로 조정은 嘉義大夫八道都摠攝兼僧大將性能이라는 讚號를 내리고 三百六十州의 僧軍을 統攝케하였으며 一七一三年에는 八方都僧統弘覺登階國一都大禪師라는 德號를 받았다. 一七一八年에는 應還大師가 八道僧風糾正都僧統이 되는 등이 모든 것은 救國護民과 朝鮮佛敎中興의 旗幟를 드날린 화엄도량의 대역사이다. 一七四十年 霜月璽篈講伯이 華嚴經을 講說함에 항상 受講弟子가 三百이 넘었으며 그중 龍潭慥冠등 뛰어난 英衲이 있었다. 一七五七年에는 會心住持가 處寬․學賛․攝心․卓戒등의 도움으로 大雄殿을 重修하고 三尊佛像改金과 後佛幀三軸을 造成하였으며 一七六一年에는 松蕓禪師가 圓通殿을 重修하였다.
一七七八年에는 僧尼와 道儒三百餘名이 契를 맺어 大雄殿과 覺皇殿의 佛米와 香燭代에 供하고자 土地를 獻納하였으며 一七九五年에는 曇仁禪師가 羅漢殿을 創建하였고, 一七九八年에는 黃岳幸元禪師가 寂默堂을 重建하였으며, 一八二七年에는 錦峰堂祐益과 朗圭禪師가 普濟樓를 重修하였고, 一八三六年에는 錦峰和尙이 凝香閣과 三殿을 重建하였으며 一八三七年에는 內院庵을 創建하였다. 一八四一年에는 正祖․純祖․憲宗․哲宗朝까지 禮曹에서 海南大興寺의 表忠祠에 守護典穀․有司와 祭享官에 華嚴寺의 宰元․錦峰․應敏․智圓․俊彦등 스님이 任命되었는데 宰元은 八道都僧統이고 智圓은 八道禪敎都摠攝이었으며 俊彦은 禪敎兩宗都有司였으니 華嚴寺의 高僧과 寺勢를 짐작할수 있다. 一八四六年에는 翠峰大師가 鳳泉庵을 創建하였고, 一八四七年에는 義憲․允幸․道實등이 合心하여 覺皇殿을 重修하였으며, 一八六七年에는 草雲堂攝律大師가 般若峰밑에 文殊庵을 創建하였고, 一八六九年에는 求禮縣監方孝函이 奉香閣을重修하였으며, 一九0一年에는 幻月禪師가 寶積庵에 選佛場을 開設하여 後學을 指導하였고 이어 震應慧燦講伯도 座主로 後學을 養成하였다. 같은해 三月부터 僧俗六十餘名이 九層庵에서 白蓮社를 맺고 發徵和尙이 乾鳳寺에서 行하였던 彌陀念佛萬日會의 遺風을 이어 받아 念佛修行을 振作하였다.
一九一五年에는 大雄殿을 重修하였으며 一九三六年에는 鄭曼宇住持가 覺皇殿을 補修하였고, 一九四三年에도 覺皇殿을 一部修理하였으며, 一九五十年六․二五韓國戰爭때에는 山內의 地藏․內院․寶積․上院․寶蓮庵등과 滿月堂이 燒失되는 아픔을 겪었다. 一九五五年 敎團淨化後田岡永信禪師가 德藏殿을 重修하였고 一九六一年에는 政府補助로 覺皇殿上層部를 解體補修하 였다. 一九六三年에는 金烏太田禪師가 塔殿을 重修하였으며 离山導光禪師가 初任一九六七年부터와 再任 一九八十年부터의 二次에 걸쳐 住持에 在任하면서 禪院의 新築․堂宇의重創․寺規의刷新․靑少年敎化등 四大目標를 設定하고 覺皇殿․大雄殿․冥府殿․普濟樓․圓通殿․德藏殿․天王門․金剛門․一柱門․寂黙堂等의 補修와 改金佛事등으로 道場을 一新中興하여 初期의 目標를 達成하고 華嚴道場의 중흥을 完遂한功勞로 一九七二年宗正賞을 받았으니 實로 近世 華嚴寺의 中興主라고 稱頌할만하다.
- 一九七五年부터 金城明煽住持가 梵鐘鑄造와 鐘閣을 建立하고 圓通殿․寂黙堂․三殿․塔殿․雲鼓閣등을 重修하였으며, 百八階段補修및 妙香臺改築等工事를 하였고, 一九八四년부터는 圓應宗源住持가 一柱門․滿月堂․圓融寮․淸風堂․緣起庵등을 復元하였으며, 一九九二年부터는 平典宗守住持가 聖寶博物館인 蓮華堂을 建立하였고, 一九九四年부터는 松泉宗烈住持가 三殿을 重創하고 道場을 整備하는 등 未盡한 佛事를마무리하고, 一九九五年 八月 寶物 제一三三호인 大雄殿앞 西五層石塔을 解體補修할때에는 부처님舍利二二顆와 七二点의 聖寶文化財가 出現하였다. 一九九八年부터는 愚岩宗乞住持가 光學藏과 禪燈禪院을 重建하고 奉香閣․鳳泉庵․惠圓堂을 重修하였으며, 二00二年부터는 愚峰明燮住持가 大衆療養所인 省行堂과 觀靜寮등을 新築하였다.
現住 持抱月宗三和尙은 二00五年 五月九日字로 就任한 以來 梵音寮를 重建하고二層普濟樓를 重修하였으며 圓融寮․淸風堂․近世華嚴寺의 中興主인 离山堂導光禪師의 行蹟碑를 세웠다. 現在建物은 大雄殿一五칸․覺皇殿二層七十칸․奉香閣一五칸․圓通殿九칸․冥府殿一五칸․羅漢殿六칸․影殿一五칸․三殿二八칸․塔殿一五칸․山神閣一칸․德藏殿二十一칸․寂黙堂四八칸․滿月堂三十칸․普濟樓二層五六칸․圓融寮二層五八칸․淸風堂一五칸․梵鐘閣六칸․雲鼓閣二層八칸․天王門六칸․金剛門六칸․光學藏三五칸․禪燈禪院三六칸․見性堂一十칸․休休堂一十칸․觀靜寮一四칸․梵音寮二層六九칸․省行堂一五칸․惠圓堂一九칸․千佛殿․聖寶博物館三九칸․一柱門․倉庫․水閣․宗務所․解憂所등 三五棟 六百五0餘칸에 達한다. 過去에는 山內에 九層庵․金井庵․地藏庵․圓炤庵․靑蓮庵․赤旗庵․隱霧庵․隱仙庵․禪定庵․深源庵․白蓮庵․道詵庵․金剛窟․鳳泉庵․聽溪庵․寶積庵․緣起庵․吉祥庵․內院庵․彌陀庵․龍穴,庵․上庵․妙香臺․文殊臺등 二四個所의 屬庵이 있었으나 自然廢墟 또는 六․二五韓國戰爭과 그후 敗隱兵討伐로 燒失되었고 現存하는 庵子로는 緣起庵․聽溪庵․九層庵․彌陀庵․吉祥庵․內院庵․鳳泉庵․金井庵․地藏庵․寶積庵․上庵․龍穴庵․妙香臺․文殊臺등 一四個所이다. 國家指定聖寶文化財로는 國寶제一二호華嚴寺覺皇殿앞石燈, 國寶제三五호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國寶제六七호華嚴寺覺皇殿, 國寶제三0一호華嚴寺掛佛幀, 寶物제一三二호華嚴寺東五層石塔, 寶物제一三三호華嚴寺西五層石塔, 寶物제二九九호華嚴寺大雄殿, 寶物제三00호華嚴寺圓通殿앞獅子塔, 寶物제一0四十호華嚴寺華嚴石經, 寶物제一三四八호華嚴寺西五層石塔舍利莊嚴具一切, 寶物제一三六三호大雄殿三身幀畵, 市道指定文化財 제四九호華嚴寺普濟樓, 市道指定文化財제一三二호華嚴寺九層庵石燈, 天然記念物三八호 올벗나무등이 있고 非指定文化財로는 浮休堂文集木板이있다. 金石文으로는 一一七二年에 道詵國師의 行蹟碑를 세웠으나 至今은 破滅되고없다. 國一都大禪師碧岩堂覺性大師碑는 李景奭이 짓고 吳竣이 써서 一六六三年에세웠고 虎隱堂文性大律師碑는 韋庵張志淵이 짓고 陳震應스님의 主幹으로 一九一九年에 세웠으며 大華嚴寺中興功德主賜僧風糾正八道都僧統錦峰堂祐益大禪師碑는 金澤榮이 짓고 一九二九年에 門孫들이 세웠으며 离山堂導光大禪師碑는 東谷一陀가 짓고 李榮植이 써서 一九八七年宗源住持가 세웠으나 規模가 矮小하고 內容이 闕略하다 하여다시 伽山智冠이 碑文을 짓고 松泉鄭夏建이 써서 二00七年에 세웠으며 司果朴弼鐘喜捨功德碑는 高墉柱가 짓고 一九三十年 寺中에서 세웠다. 高僧의 浮圖로는 桂坡堂性能塔․比丘尼順洪知云應安塔․東軒堂完圭塔․大月堂塔․登階景峰堂塔․明谷堂玄眼塔․碧岩堂覺性塔․보산당탑․養直堂塔․慈雲堂處寬塔․震應堂慧燦塔․幻空堂塔등이있으며 筆跡으로는 宣祖의 第八王子인 義昌君의 글씨인 大雄殿扁額과 一柱門扁額이있고 이밖에도 秋史金正喜와 蒼巖李三晩栢庵性聰의 親筆書簡등이 유적으로 전해지고있다. 大海같이 悠長한 華嚴大道場의 寺跡을 有限石面에 略述하니 面外의 遺事 또한寺勢法風과 더불어 永遠無窮키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