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지리산 대화엄사


창건연혁

화엄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지리산 대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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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창건설화


한반도와 만주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된 뒤 제각기 국력을 기르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국을 비롯한 멀리 천축에서까지 문화와 문명을 수입하여 바야흐로 태평성국의 기틀을 다진 삼국시대의 중엽,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단에 우뚝솟은 두류산(頭流山 : 현 智異山)에 봄이 무르익어가는 삼월중순 무렵.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한창 바삐 일손을 놀리고, 동리에서 꼬마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소꼽놀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꼬마들은 멀리 두류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석으로 염불을 외던 대로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선재할아버지는 밭 언덕에 쉬면서 꼬마들의 놀이에 눈을 던지며 미소를 지으면서 두류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노인은 어제도 그제도 산 중턱 골짜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지금 또 안개마냥 골짜기에 번지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박노인은 필시 산중에 무엇이 있겠구나 하면서 마을사람 십여명을 대동하고 골짜기에 이르렀다
계곡 겉에 움막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움막 안에서는 낭랑한 목소리와 장중한 음성이 조화를 이룬 독경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사람이 읽고 있는 독경 소리를 알아들을 줄도 몰랐으며, 독경이 끝나고 잠시후 한 사문이 나왔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사문의 모습은 이들의 마을 십여리 떨어진 홍련사(紅蓮寺) 라는 절의 스님과 어딘가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가 우리민족과는 전혀 달랐으며 가사를 둘둘 말아서 몸을 감고 있는 점이었다. 박노인은 사문과 합장한후 대화를 나눴지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사문은 움막안에서 벼루, 붓, 종이를 갖고 나와 글로서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은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온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을 하였다. “빈도는 바닷가의 절에 살면서 바다 속에 사는 연이라는 짐승과 친해졌지요. 이 연은 능히 공중을 날으고 바다 속으로도 헤엄쳐 가며 바다에 떠서 배처럼 다니기도 합니다. 빈도는 이 연을 교화하여 오계(五戒)를 주고 제자를 삼아 이곳에 같이 왔고 방금 읽던 경전은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 이렇게 필담을 나눈 후 사문은 저녁공양 거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피리 비슷한 악기를 꺼내어 입에 대고 길게 세 번 불어대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년묵은 거북만한 연이 공중에서 날아오더니 사문 곁에 사뿐히 내려 앉았는데 그 형상이 머리는 꼭 용같고 몸은 거북이며. 몸 길이가 열자는 넘어 보이고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었다. 박노인 일행은 숨을 죽이고 이 신기한 동물을 보느라고 노비구니께서 그들의 등뒤에 나와 서 있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연의 등에 사문이 앉자 노비구니는 바른손을 들어 번쩍들어 떠나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문은 노비구니에게 합장하고 다음에 연의 목을 쓰다듬어 주고는 범어로 머라고 이르니 연은 곧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박노인 일행들은 감탄을 말하며 사문이 사라져간 남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다. 연을 타고 다니시니 연존자라 할가. 비연존자(飛淵尊者)라 할가. 의논한 끝에 연기존자(緣起尊者)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후 “우리 고을에 경사가 난거야. 부처님께서 태어난 나라에서 오신 스님께서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화엄경올 백제땅에 가져왔으니,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한 이곳이 바로 최고의 불연국토(佛緣國土)야" 몇 달이 지나고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고 박노인의 손자인 선재를 시자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존자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나 예불할 장소가 마땅치 못했다. 움막에서 그러한 생할을 할 수 없다하여 박노인의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존자님께 간청을 하여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룩된 건물이 요사(索舍)겸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또 한해가 지난 다음해 가을에 대응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인 법당이 낙성되었다. 바로 이해가 백제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박노인은 존자에게 연기존자님 이라고 부르고 있아오니 연기사(緣起寺)라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자는 한참동안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며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독송해 왔고 현재도 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창해를 건너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華嚴寺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마을사람들은 “존자님께서 命名(명명)한 가람 이름에 이의가 없이 대찬성입니다. 화엄사, 화엄경. 화엄법문, 연화장 세계라 이 나라가 연화장 불국토세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존자는 또 한마디 하는데 “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러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 "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善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하여 智利山 華嚴寺가 되었다.
연기존자는 박노인의 마을사람들에게 특별히 차공양을 했다. 처음 먹어보는 차맛이었다. 혀끝과 입안에 젖어드는 향내음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존자님, 이 차는 무슨 차 입니까 ?"
이 차는 작설차(崔舌茶)라고 하는데 빈도가 여기에 올 때 수십 그루의 차나무와 씨앗을 갖고와 이산 금방에 심어 났지요. 이 차는 불보살님께 올리는 귀중한 차이지요. 이 차를 올린 후에 이렇게 게송하지요.
“깨끗한 맑은 물 감로수로 변하여 삼보님께 받잡노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하고 염불, 독경을 한 후 내려서 빈도가 마시지요. 이 찻잔 안에 화엄법계의 무진법문이 들어있고 자비광명이 충만히 들어 있지요. 여러분 이 차를 드시지요. 이 마을사람들은 찻잔을 들어 불단에 올려놓고 게송을 읆고는 소원을 빈 다음 찻잔을 불단에서 내린 후 제자리에 각기 앉아서 흡족하게 차를 마셨다.
연기존자는 “빈도가 천축에서 제조하여 가지고 온 것이 조금 있어서 여러분께 차공양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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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빈도의 소원대로 화엄법문을 문수보살 도량 에서 선양할 수 있도록 화엄사를 창건한 여러분의 불사동참 공덕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맙기 때문이오. 여러분의 마음이 곧 불보살님의 마음이 아니겠소. 그래서 여러분께 차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그윽한 차 향기는 화엄사 골짜기를 맴돌고 연화장세계에 가득가득 퍼졌다. 연기존자는 화엄법문을 들려주는 것과 차공양으로 마을사람들의 노고에 보답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존자의 위덕과 효심과 무궁무진한 법문에 감화를 입어 어느덧 신심이 지극한 신도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화엄사에 도인이 계신다는 소문은 날로 펴져서 널리 알려졌으며 연기존자는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삼아 문수대성의 명호를 날마다 십만송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그를 찾는 청신사 청신녀에게 문수보살의 위덕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두류산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방방곡곡에서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으로 여기고 지리산이라 부르는 이가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라 하거니와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일체보살중에 상수(上首)의 위치에 있는 보살이시며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泳山)이라 하므로 사람들은 때로는 지리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연기존자는 이따금씩 연을 타고 지리산의 여러곳을 두루 살피기도 하고 더러는 며칠씩 묶고 오는 일도 있었다. 존자는 이산의 주봉올 반야봉이라 이昌 하였으니 반야(般苦)란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이다. 이 주위가 팔백리나 되는 웅장한 산이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이라면 이 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면 산 그대로가 바로 문수의 몸이 아니랴? 수천척 높이의 봉우리가 수백도 더 되는 우뚝한 산 전체가 그대로 문수대성의 진신(眞身)이요 본면목인 것이다. 존자는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S)라 하였는데 문수를 한역을 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禪) 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 (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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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이야기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義湖)스님은 유학길을 포기한 원효(元효)스님에게 자기가 화엄학에 통달함을 자랑하고 싶어서 화엄경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더니 원효스님은 막힘없이 답변함에 의상스님은 놀라고 말았다.


"화엄학(華嚴學)은 해동(海東)에서는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원효스님은 어떻게 화엄학에 대하여 통달올 했을가" 하고 생각하며 " 스님 소승이 당나라로 유학하여 화엄학을 전수받고 인가(認可)를 받은 사람은 저 훈이고 해동의 화엄학 시조(始祖)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스님은 화엄학에 대하여 달통하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132여년전 백제국 구차례(求次禮: 현재 구례)라는 곳 두류산(지리산)에서 범승(楚僧)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올 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常住說法處)라 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올 설했다고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화엄사는 백두산의 혈맥과 섬진강의 태극이 합류하여 무한한 힘이 솟는 곳이지요.
고구려는 백두산의 힘. 백제는 백두산의 혈맥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고 신라국은 혈맥이 없어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화랑들은 지리산 세속평정에서 무예를 닦으며 그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백제 무왕때 우리가 그 곳을 차지했지요. 화랑도에게 무한한 힘을 언을 수 있게 되어 용맹스러움이 서라벌까지 전해지고, 이 소승도 화랑도 출신이라 화랑도에게 삼국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화엄사에 가 보았지요. 그 곳이 중국적인 화엄사상이 아니라 불타의 나라 천축에서 온 화엄의 도량인 것을 알고 감회가 깊었지요.
이국땅 백제국에서 화엄의 꽃이 피워 있을 줄이야. 등잔밑이 어둡구나. 의상스님은 지척에 천축적 화엄사상을 두고 위험을 무릎쓰고 멀리서 중국적 화엄사상을 배우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소승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하고 연기조사, 자장법사께서 거주(居住)하시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올 설하며, 천차만별의 강물이 바다로 모이면 이름과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 하듯 삼국이 어디에 있는가. 한민족이 아닌가. 이렇듯 화암사상은 화랑도에게 원융무애한 힘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지요."
의상스님은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화엄학의 시조요.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화엄사상을 갖고 근본도량을 삼을 수 없다하여 문무왕 17년(677년)에 지리산화엄사에 오셨다.
“이곳이 바로 범승이신 연기존자가께서 화엄의 꽃을 피었던 곳이니 부처님의 성지에 온 느낌이구나. 여기야말로 해동의 연화장세계로구나. 삼국인이 한 민족임을 실현하는 정신적 통일을 이루게 하며, 또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움으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게 위하여. 부처님의 화엄학을 빌어 백두산의 혈맥 아래에 장육전(丈A殿) 법당을 건립하여야 겠구나."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16자)올 일컬으며 장육금신(丈大金身)이라 한다. 2층4면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올 돌에 새기고, 황금장욱불상(黃金丈A佛像)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화엄경은 팔십화엄(八十華嚴)으로 10조9만5천48자로 되어 있으며 옥돌에 새겨진 화엄경은 부처님의 화엄사상을 꽃피웠고, 지금도 그 석경(石經)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연화장세계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의상조사께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어 화엄사상 선양에 전신의 노력을 기우렸다.
화엄십찰은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 태백산부석사(太白山 山浮石寺) 원주 비마라사(原州昆麻羅寺), 가야산해인사(例側山海印寺), 비슬산옥천사(昆瑟山 玉泉寺), 금정산범어사(金井山楚魚寺, 팔공산미리사 (八公山 美理寺), 계릉산갑사(鷄龍山陣寺), 옹주 가야협보원사(能州 例側映普願寺) 삼각산청담사(三角山淸澤寺) 등이다.
인도(印度)적 화엄사상은 연기존자께서 씨를 뿌려 백제 승려와 백제국에 화엄의 꽃을 피웠고, 또 다시 신라 자장법사에서 원효성사로 이어 의상조사로부터 화엄의 중풍(宗風)이 해동에 가득하여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승이라는 부촉이 있었다고 말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사시(巳時)마지 때 대웅전에 두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있다면 산승(山僧)과 함께 장육전 중건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 하는 바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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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모든 대중들은 차례차례 계파스님의 지시대로 시행하였으나 손에 밀가루 묻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천여중 대중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하는 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더니만, 맨 나중에 시험해 본 공양주 스님의 손에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숭의 중임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공양주 스님에게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福方)이 천여명 대중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의 시험에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대성께서 지시한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입니다. 그러므로 대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불사를 이루도록 합시다."
공양주 스님은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껏 걱정하며 대웅전에 정좌(正坐)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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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사몽간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서 말하기! “ 그대는 걱정 하지말라. 내일 아침에 바로 화주를 위해 떠나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용기를 얻어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며 ‘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일주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니 그의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자식도 없이 혼자서 움막에 사는데 절에 자주 올라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하였으므로 공양주였던 스님과는 아주 친근히 지내온 터였다. 화주승은 노파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하랴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간밤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교시를 생각하고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올 올리며, “ 오 ! 대시주이시여 !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이렇게 외치며 절올 계속 하였다. 노파는 처음엔 서로 익히 아는터라 농담으로 그러는 줄 여겼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했다.

화주승은 하루종일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홀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 서원을 발했다.
“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 가호를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리며 수십 번 절한 뒤 소(沼)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은 아니었다. 화주승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질색하여 그 길로 멀리 도망쳤다.
그후 오륙년이 흘러 한양성에 다달았다. 화창한 봄날 하루는 창덕궁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밖을 나와 놀던 어린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공주는 화주승올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와서 우리 스님이라면서 누더기 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화주승이 꼭 지고 있던 그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감격하여 “ 오!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이루어 저야 말고."하며 장육전 건립의 대 서원을 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서는 공주를 위해 장육전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賜額)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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