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절이 여덟이요 암자가 여든 하나
구층암은 화엄사에 딸린 암자이므로 그 역사 또한 화엄사의 역사에 편입되어 서술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화엄사사적>(1697; 1924) 및 <봉성지>(1800)를 보면 신라 경덕왕 때에 “큰절이 여덟이요 부속 암자가 여든 하나大寺八屬庵八十一”라 하였으니, 이 서술 내용에는 구층암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현재의 화엄사 경내 및 산중 암자, 인근 마을에까지 이르는 각종 유구들을 조사해 보면, “대사8 속암81” 내지 “8원 81암”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구층암은 늦어도 신라 경덕왕 때에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나아가 <화엄사사적>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있었다고 전하는 각종 전각, 당우 및 암자의 이름을 그 위치까지 지정하여 예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구층암은 “봉천원奉天院”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먼저 구층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을 살펴보도록 하자.
구층암 뜨락에 오를 때 보이는 석탑 부재들
계곡을 따라 대숲을 지나 구층암에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맞는 석물은 계단돌로 쓰이고 있는 석탑 부재이다. 이 석탑 부재를 딛고 뜨락에 오르면 왼편으로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탑신부며 옥개석 등의 석탑 잔편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다. 이 석물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애초에는 삼층석탑 두 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현재의 삼층석탑 한 기는 사실 1961년에 각황전을 중수할 때 구층암 주위 사방에 널려 있는 부재들을 수습하여 세운 것이지만,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대략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연대를 잡는다. 천불전 앞의 석등과 배례석 역시 비슷한 연대로 보며, 현재 화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려시대 동종 역시 구층암의 옛 천불전 터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들 석물들과 동종은 나란히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건립되거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바, 현 구층암 사역은 적어도 이들 유물보다 앞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냇물은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흐르고
현재의 봉천암鳳泉庵과 길상암吉祥庵 및 인근의 여러 암자 터를 포괄하는 구층암 사역이 신라말/고려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예상이 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암자나 원院의 이름으로 ‘구층’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는 임진란 내지 정유란 시기에 불에 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중수되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1697년에 <화엄사사적>이 간행되었으나, 여기에는 당시 중수되었던 전각이나 암자 이름이 아쉽게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기록에 구층암 사역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추강 남효온의 <지리산일과>(1487)를 살펴보도록 하자.
신미일. 쌀 다섯 되를 남겨두고 설근과 헤어지다. 밥을 먹은 뒤 초막을 출발하여 연령을 지나 고모당을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보월, 당굴, 극륜 등의 암자를 지났다. […] 이날 삼십 리를 걸어 봉천사奉天寺에 이르렀다. 절은 대숲에 있었으며, 누 앞으로는 긴 시내가 있어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흘렀다. 아름다운 절이로고! 이날 황제가 승하했다는 불우한 소식을 들었다. 주지는 육공이었다. 신축년(1481)에 산에 놀러갔을 때 개성의 감로사에서 본 자였다. 나를 누상에서 접대하고는 선당에 묵게 하였다.
임신일. 비가 내려 봉천에 머물다. 누상에 앉아 근체시 한 수를 얻었다. 시첩은 누의 창에 있다. 계유일. […] 밥을 먹은 뒤 내려가 황둔사黃芚寺를 둘러보았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花嚴으로 명승 연기가 창건한 절이다. 절 양편으로는 모두 대숲이었다.
辛未. 留米五升別雪根. 食後發伐艸幕. 過淵嶺登姑母堂. 挾右牛翻臺而南下. 過寶月,堂窟,極倫等庵. […] 是日行三十里. 抵奉天寺. 寺在竹林中. 樓前長川. 行竹底而鳴. 佳刹也. 是日聞皇帝陟方之奇. 住老六空. 辛丑年遊山時見於開城甘露寺者. 接余樓上. 館余禪堂. 壬申. 滯雨留奉天. 坐樓上覓近體一首. 帖在樓囱. 癸酉. 飯後下觀黃芚寺. 寺古名花嚴. 名僧緣起所創. 寺兩傍皆竹林
남효온은 조선초 1487년에 지리산 일대를 답사했다. 그는 9월 신미일에 반야봉 인근의 초막에서 출발하여 연령-노고단-보월-당굴-극륜-봉천사에 이르는 삼십 리 길의 산행을 했다. 이 산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노고단에서 출발하여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길은 노고단과 우번대 사이의 화엄사 골짜기를 따라 하산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이 길은 무넹기, 코재에서 시작하여 집선대, 국수등을 거쳐 구층암, 화엄사에 닿는다. 즉 노고단에서 화엄사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인 것이다.
구층암의 대숲과 오솔길. 시냇물은 이 대숲 아래를 뚫고 흐르니 난간 앞의 노래가 된다.
또한 ‘보월寶月’이라는 암자명은 <화엄사사적>(1924)에서 한자는 다르지만 음가는 동일한 ‘보월정사普月精舍’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남효온이 언급하는 암자들은 비록 현존하지는 않을지라도 당시 화엄사의 속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봉천사와 화엄사를 오가며 묵었던 이후 일정으로 보건대, 봉천사는 화엄사와 몹시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효온이 답사한 ‘봉천사奉天寺’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화엄사의 바로 윗편의 구층암 일대로 비정함이 타당하다. “절은 대숲에 있었으며, 누 앞으로는 긴 시내가 있어 대숲 아래로 소리를 내며 흘렀다”는 묘사는 현재 구층암 일대의 풍경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법 사격이 컸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화엄사사적>(1697)에서 때마침 ‘봉천원’ 사역을 기록하고 있어 보완이 된다. 전각과 당우의 이름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봉천원 겸 연등각 13간, 정문 겸 산호루 13간, 종각 3층3간, 자미당 3간, 삼광전 3간, 도솔전 3간, 제석전 3간, 칠성전 3간, 팔관당 5간, 좌우경루 각3간, 배운루 3간, 의상암 3간, 동손암 3간, 죽조암 3간, 봉래암 3간, 십육나한전 5간, 오백응진전 9간, 천불전 15간
위 봉천원 기록은 <화엄사사적>을 기록할 당시 고래로 건립된 적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왔던 내용이다. 이것은 어느 한 시점의 전체 규모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에 걸쳐 명멸했던 이름들을 통시적으로 종합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 봉천원 기록이 고스란히 봉천원의 규모를 뜻하지는 않는 한편 더러는 관련 내용이 일실되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남효온이 며칠동안 묵었던 ‘봉천사奉天寺’가 사적기에서 말하는 ‘봉천원奉天院’과 동일한 사찰이라고 보면 그가 접대를 받았던 누각은 다름아닌 ‘산호루’나 ‘배운루’였을 것이며, 당시의 수행승은 적어도 30인 이상이었다. 그리고 현재 구층암의 주불전인 ‘천불전’이 기록에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호남봉성지지리산화엄사봉천원중창상량록>(1874)의 제명에서 ‘봉천원鳳泉院’이라는 이름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사적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봉천원奉天院’은 필시 현재의 봉천암을 포함한 구층암 사역이 아닌가 한다. 음가(봉천)는 같은데 한자(奉天/鳳泉)만 다른 경우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지리’와 ‘화엄’만 해도 음가는 같은데 여러가지 다른 한자 표기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남효온은 비오는 날 봉천사 누상에 앉아 칠언율시 한 수를 얻었으니, <봉천사 누창에 쓰다書奉天寺樓囱>가 그것이다. 이 시는 그의 <추강집>에 실려 있거니와 가을날 구층암의 우중 풍경으로 운위될 만하다:
머리깎은 이 삼십이 유생에게 인사할 제
구월의 두류산은 수목에 비단을 둘렀구나.
빗방울 때리고 바람 비껴 부니 누 밖의 소리요
시냇물은 대숲 아래를 뚫으니 난간 앞의 노래라.
서리는 능히 천 그루의 잎을 떨어뜨려도
가을은 한 그루의 마음을 떨구지 못하는구나.
고담한 마음속 회포는 도리어 활발발하여
새벽 창가 차를 마시니 사방의 산은 잠겨 있더라.禿翁三十謝靑衿 九月頭流錦樹林
雨打斜風樓外響 溪穿竹底檻前吟
霜能脫落千林葉 秋不彫零一木心
枯淡襟懷還潑潑 曉囱茶罷四山沈
불타는 화엄사, 그리고 아흔 여덟 대덕의 토굴살이
화엄사는 임진난 내지 정유난의 병화로 전체적으로 불탔다. 이를 두고 홍세태는 “도선의 유적은 외로운 연기 뿐道詵遺跡只孤烟”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화엄사사적>(1924)은 선조26년(1593)에 절이 불탄 뒤에 아흔 여덟 분의 대덕들이 토굴살이에 의지하면서 터를 지켰다고 적고 있다. 구층암의 사역 역시 이때 불탔을 것이다. 특히 정유난에는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섬진강을 따라 내습하여 구례와 남원 일대가 가장 참혹한 병화를 입었으며, 구례의 봉성과 남원성이 함락될 즈음에 지리산 산중구곡의 암자들까지 모조리 불에 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정유난에는 석주관 전투에서 화엄사 승려 153인이 전사하기도 했다.
구층암 가는 길에 뒤돌아본 각황전
큰절이 여덟이요 암자가 여든 하나였건만, 이제 화엄사는 외로운 연기 한 가닥만 남고 말았다. 그러나 토굴살이를 하며 터를 지켰던 대덕들의 덕으로 화엄사는 현재의 사격으로 다시 서게 된다. 병화를 입은 지 삼사십 년이 지나 인조8년(1630)에 마침내 화엄사 중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각과 당우, 암자가 차차 건립되었다. 인조23년(1645)년 즈음에는 이미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적전, 해운당, 송객료, 계명당, 만월당, 선당, 쌍련당, 향각전, 부도전, 동방장, 동전, 승당 등의 전각과 당우가 건립되었으며 암자로는 보적암, 금정암, 상암, 봉전동암, 상용문암, 하용문암, 은선암, 부도전, 적기암 등이 건립되었다. (이 내용은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1645년 <화엄사상물건도록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층암은 인조25년(1647)에 중창되었다. 그리고 화엄사 중건 대역사의 마지막은 장육전(각황전)의 중건으로 숙종25년(1699)에 시작해 숙종28년(1702)에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703년에 삼존불과 사보살상을 조성하고 이레동안 경찬법회를 열었다. 병화로 소실되고 나서 거의 일백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현재의 사격을 되찾은 것이다.
선원, 강원, 백련사, 비구니 도량, 불교정화 운동
이후 구층암의 역사는 <구층대상량문>(1937)과 <봉성지>(1800), <중수구층암기>(1899), <화엄사사적>(1924)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구층암은 1647년에 중창되었다고 하였으나 이 연도는 2차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향후 비공개 자료인 여러 중수기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개된 여러 자료의 정황상 1647년 무렵에 중창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1772년에 봉암장로 등이 구층난야에서 경찬법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한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0년에 간행된 <봉성지>에서는 화엄사 속암으로 ‘구층’과 ‘봉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바, 1849년의 <봉천암중창기>는 임진난 이후 최초 중창이 아니라 대규모 중수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로 ‘구층’과 ‘봉천’을 언급하는 사료들은 풍부하므로 현재의 구층암 사역은 17세기에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화엄사의 구층과 천은사의 수도와 내산사의 영원에서 사교를 수료”한 청하탄정 선사의 행장으로부터 1800년대 후반에 구층암이 강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98년에 구층암이 중수되었다. 매천 황현은 중수된 구층암에서 이틀을 묵고서 쓴 <중수구층암기>에서 “기와와 서까래를 곱고 산뜻하게 일신하였다”고 썼다. 1901년에는 승려도속 60인이 구층암에서 백련사를 결사하고 발징화상의 유풍을 진작시켰다. 특히 1900년에는 청하탄정 선사가 견성당에 설선회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경허선사를 모시고 상원암에다 선원을 복설하였는데, 이 상원암은 현재 구층암 일대에 포진하고 있는 여러 암자터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모과나무 기둥으로 유명한 구층암 본존요사. 현재 다실로 쓰이고 있는 이곳은 선방·강원·결사도량 등으로 쓰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구층암의 역사는 본존요사가 애초부터 선방 내지 강원의 용도로 건립되었음을 알려준다. 즉 좌우에 방장실을 두고 가운데에 선방을 둔 구조로서 대중이 모이기에 적합하기에 때로는 선원으로 때로는 강원으로 때로는 백련결사의 도량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구층대”라는 이름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며, 사중의 기록들은 유생 황현의 <중수구층암기> 외에는 대부분 “구층대”라고 불렀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구층암이 한때 비구니 도량으로 쓰였던 흔적은 천불전 화단에 세워져 있는 비구니 덕선스님의 공덕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비구니 법희선사가 한때 구층암에 머물러 수행했던 이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때가 1941년으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마도 일제군국주의 시대의 여파였던 듯 화엄사 전체가 어떤 공적 기록물도 남지 않은 암흑기로 접어든다. 이 암흑기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바, 여순사건에서 촉발된 지리산 빨치산 투쟁으로 말미암아 195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속수구례지>에서는 산승이 하야한 것이 7년 간이라고 기록했다. 7년 간에 걸친 전투 끝에 빨치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1954년에 비로소 지리산 입산이 허락된다. 때마침 1954년에 불교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화엄사의 주체세력이 대처승에서 비구승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구승이 맨 처음 입주한 곳이 바로 구층암, 봉천암, 금정암이며 이후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1961년에 비구승이 화엄사에 완전히 입주한다. 그리하여 화엄사는 마침내 암흑과 전란에서 빠져나와 빛나는 역사의 전통 위에 법등을 켠다.
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화엄사가 전소될 뻔한 위험에 처했으나 차일혁 토벌대장이 이를 막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1948년 여수, 순천, 백운산을 거쳐 마침내 지리산에 입산한 김지회 부대 등은 노고단을 거점으로 삼고 산 아래 마을들을 순식간에 점령한 다음 구례 전체를 해방구로 만들려는 의도로 대규모 정규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국군의 백인기 연대장이 산동군에서 피습당하여 자살한 것이 이 무렵으로, 이후 구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불에 타고 말았다. 칠불사, 연곡사가 전소된 것이 이 무렵이요 화엄사의 지장암과 사하촌 여관마을이 불탄 것도 이 무렵이다. 노고단 산정 주위의 서양인 별장촌 60여 채도 이때 불탔다. 그러나 깊은 산 지리산은 천혜의 은거지였고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0년에 내원암, 보적암이 파괴되고, 1951년에는 상원암, 보운암, 만월당이 소실되었다. 이때 작전을 주도한 것은 제11사단으로 화엄사마저 소각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으나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
이후 제8사단이 새로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였고, 1951년 5월 10일 군경합동작전회의에서 또 다시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펼치기 위해서였다. 이때 차일혁 부대장은 관할 지역이 아닌데도 화엄사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다른 부대장을 대신하여 화엄사에 들어가 대웅전 앞에서 문짝들만을 뜯어내 소각하는 상징적 행위로 그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화엄사가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구층암도 살아남았다. 빨치산 토벌대장이었음에도 적 이현상의 주검을 정중히 화장하고 권총 세 발을 예포로 쏘았던 차일혁은 늘 염주를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이현상 주검의 주머니에서도 염주가 나왔다. 차일혁 공덕비는 화엄사 경내에 세워져 있다.
용맹정진과 야생차
길게 잡아 이삽십 여년 간의 암흑기와 전란기를 빠져나온 화엄사는 도광스님이 주지를 하면서 오늘날의 가풍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도광스님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화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봉천암, 구층암에 용맹정진 선원을 개설하였으며, 이에 전국의 제일납자들이 생사를 내놓고 정진하였다. 그 당시 전강스님이 한 시절 봉천암에 조실로 있기도 하였으며, 일타스님 역시 구층암 선방에 방부를 들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한 일화는 정찬주의 소설 <인연>에서 그려진 바 있으니 이를 소개한다:
방광의 이적을 보인 일타는 화엄사 선방에 하안거 방부를 들였다. 화엄사는 쌍계사와 달리 비구 대처 간의 시비가 전혀 없었다. 관광객이 드문드문 들르지만 수행하기에 아주 조용하고 기운이 좋았다. 더구나 선방으로 운용되는 구층암은 대웅전 바로 뒤 백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도 경내와 달리 깊은 산중처럼 적막했다.
구층암의 천불전이나 요사채도 대웅전처럼 4백여 년 된 건물이었다. 그러니 구층암 선방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지리산 산신령이 드나들고 조왕신이 상주하는 신령한 공간이었다.
구층암 선방 너머로는 지리산 계곡물이 소리쳐 흐르고, 천불전 계단 옆에는 모과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산에 자생하는 모과나무였다. 고목이 되면 목재로 사용하는 듯 구층암에는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기둥들이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있었다.
일타는 모과나무 기둥 사이의 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구층암에서 서른 걸음 거리에 자리한 암자가 봉천암인데, 이곳에 전강이 화엄사 선방의 조실로 머물고 있었으므로 화엄사 스님들은 봉천암을 조실채라고 불렀다.
─ 정찬주, <인연> 중에서
그러하니 구층암이 한 시절 한국 선불교의 선등이 가열하게 타올랐던 곳임을 알고 우리는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숲 아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이제 구층암은 산중 적막처라기보다는 신도들과 관람객들이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암자가 되었다. 아울러 구층암 가까운 곳에 선등선원이 설립됨으로써 구층암은 이제 선방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원, 강원, 백련결사 도량, 비구니 도량, 용맹정진 도량으로 쓰였던 역사를 거쳤던 만큼, 구층암의 건축에서나 자연환경에서나 그 풍모를 간직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바로 이것이 구층암에 들 때 은은히 번져오는 첫 인상의 근원일 것이다. 그러하니 우리는 그 향취를 소매에 묻히고 자연스럽고, 질박하고, 아담하고, 깨끗하고, 고요한 곳을 소요할 일이다.
구층암 사역 주변의 야생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다.
이제, 구층암 본존요사의 선방은 누구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로 변모되었다. 현재 화엄사 각황전 뒷편에서 시작하여 구층암, 봉천암에 이르까지 월류봉, 차일봉 능선 자락을 타고 야생차가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다. 넓게는 부도밭에서 연기암까지 군데군데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기도 하다. 그간에 산중의 스님들만이 끽다했던 이 야생차는 이제 구층암 다실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도 제공되고 있다.
선다일미禪茶一味라는 말이 있으나 무릇 선禪에 참參하지 않은 채 맛만을 운위하여 그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니, 먼저 우리는 선방으로 쓰였던 구층암의 역사를 품에 안으며 선정禪定에 들어야 할 일이다. 구층암 선원에서 용맹정진을 하던 수행자들에게 일미一味를 전하여 수행의 힘을 북돋아 주었던 그 야생차가 이제 또 다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으니, 반갑다 아니할 수 없다.